** 아래의 글은 저자의 개인적 견해로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지난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사태는 우리 선거관리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가 중단되었고 이에 유권자들은 장시간 대기하거나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관리 주체인 선관위는 이에 적시 대응하지 못했다.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한 중차대한 사고였다.
사고가 발생하면 으레 ‘누가 잘못했는가’를 묻는다. 이번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현장의 실수와 담당자의 책임으로 향했다.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엄정하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음 사고를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같은 조건이 유지된다면 실수는 반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휴먼 에러 연구자인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은 이에 대해 결이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는 “누가 실수했는가”보다 “왜 그 실수가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는가”에 주목한다. 리즌은 사고를 사람 중심 접근과 시스템적 접근으로 구분하여 바라본다. 전자가 사고의 원인을 개인의 부주의나 실수에서 찾는다면, 후자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오류를 범하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사고를 줄이는 길은 사람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실수를 흡수하고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리즌의 ‘스위스 치즈 모형(Swiss Cheese Model)’이다. 조직에는 여러 겹의 방어막이 존재하지만 각각의 방어막에는 스위스 치즈처럼 곳곳에 ‘구멍’이라는 허점이 존재한다. 평상시에는 어느 한 겹에 구멍이 뚫려 있더라도 다른 치즈가 이를 보완해 주어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구멍들이 우연히 일렬로 정렬되는 순간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사태도 그렇다. 투표용지 수요 예측이 빗나갔다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예비 물량이 충분했거나, 예비 물량이 부족했더라도 실시간 모니터링이 제대로 작동했거나, 그마저 안되었더라도 인접 투표소의 남은 물량이 즉시 재배치 되었더라면 투표 중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요 예측 오류와 대응 실패라는 여러 개의 치즈 구멍들이 한순간 일렬로 정렬되면서 결국 방어막이 무너지게 되었다. 2021년 독일 베를린 선거 역시 동일한 맥락의 사고를 겪으며 재선거라는 초유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애초에 ‘구멍 없는 치즈’란 존재하지 않는다. 리즌은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전제하고 이에 기초하여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스템적 접근의 본보기가 바로 ‘고신뢰 조직(High Reliability Organization)’이다. 원자력 발전소나 핵추진 항공모함, 항공관제센터처럼 단 한 번의 실패가 곧바로 대형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조직들은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당연시하며 이를 둘러싼 작은 이상 징후와 근접 사고(near miss)를 끊임없이 수집하여 잠재적인 위험을 개선해 나간다. 하나의 방어막이 뚫리더라도 다른 방어막이 이를 막아내도록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구축하는 것이다.
선거관리도 예외는 아니다. 2,335개의 선거구, 7,782명의 후보자, 1만 4,288개의 투표소, 그리고 4,460만여 명의 유권자 사이에서 완벽한 선거관리를 해야 한다. 투입되는 투개표 관리 인력만 31만 명이 넘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작은 오류가 여러 단계를 거치며 선거관리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찰스 페로(Charles Perrow)의 ‘정상 사고’ 이론에 따르면, 이렇게 고도로 복잡한 시스템에서 사고는 예외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정상(normal)’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인간의 실수를 제거하겠다는 불가능한 목표 대신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흡수하고 막을 수 있는 겹겹의 치즈 방어막을 쌓아놓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 될 것이다.
국민 참정권의 중요성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완벽에 대한 강박과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동시에 존재한다. 투·개표사무를 수행하는 모든 사람은 실수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실수가 국민 참정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실수하는 인간을 전제로, 시스템이 어떻게 국민의 권리를 끝까지 지켜낼 것인가. 이제 선거관리도 그 질문에 답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