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계엄에 대한 소고


작년 12. 3. 비상계엄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역사책에만 존재하던 '군대를 동원한 계엄'을 현실로 끌어온 점이 그랬고,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총칼로 점령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또 그랬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계엄을 선포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잘 만들어진 딥페이크 같았지만 그것은 아뿔싸 현실이었고, 누가 뒤에서 칼 들고 협박해서 그렇겠지 했지만 놀랍게도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번양보해서 대통령의 계엄선포권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으니 생각은 한 번 해볼 수 있다고 하자. 그래도 그건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국가안보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규정이지 평온한 겨울밤에 느닷없이 사용하라고 준 건 아니었다.


전쟁 방지하라고 국군통수권 줬더니 혼자만 배틀그라운드를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겠나. 헌법 규정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하라는 게 아니라 실제 상황이 일어나면 해야 하는 거라고 김철수 교수님 헌법책에 잘 쓰여 있었을 텐데 시험범위가 아니어서 빠뜨렸나 싶다.


어쨌든 많은 국민들이 이게 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하는 마음으로 그날 밤 TV를 봤을 것이다. 나 역시 가족들과 평온한 저녁을 보내고 첫째를 막 재우려는 찰나에 계엄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은 상기된 얼굴로 당장이라도 국가 안위가 무너질 것처럼 열변을 토했지만, 80년대 땡전뉴스를 TV로 다시 보는 것 마냥 전혀 공감되지 않았고 마음만 무거워졌다. 장차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미래의 새싹인 어린이(우리 아들)는 내 옆에서 새근새근 평화롭게 잠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북한이 무슨 도발이라도 했나 싶어 주요 외신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나 싶어 베이징 휴민트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심지어 걔도 자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북한 김정은도 그날 저녁은 푹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밤사이 남한 비상계엄 소식에 무척이나 놀랐지 싶다.


그러면 도대체 다 자는 밤에 대통령은 무슨 일에 있었길래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고 판단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했을까. 유부남 입장에서는 부부싸움이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까지 간 적은 있지만 와이프가 무서워 계엄 선포할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대통령의 임계점을 넘게 했을까.


아마도 그 질문의 답은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만, 우리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당시 대국민 담화의 내용을 통해 그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국회의 정부관료 탄핵소추와 예산삭감 등으로 인해) 국정은 마비되고 국민들의 한숨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짓밟고, 헌법과 법에 의해 세워진 정당한 국가기관을 교란시키는 것으로써, 내란을 획책하는 명백한 반국가 행위입니다.

국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탄핵과 특검, 야당 대표의 방탄으로 국정이 마비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된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저 내용 중에 어느 부분이 현재 대한민국이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고 판단할 여지가 있는지 범부의 부족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찾아내기가 어렵다. 아마 10년 가까이 사법고시를 준비한 사람이 있다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회 = 괴물'이라고 판단하고 있는데 과연 누구 괴물인지 반문하고 싶어지는 명문이다.


물론 비상계엄의 위헌, 위법성에 대한 판단은 탄핵심판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가 해줄 것이다. 내란죄와 직권남용죄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이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동안 담담하게 팝콘 먹으면서 결과를 지켜보면 될 것이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비상계엄의 영어표현은 Martial law 다. 군대를 동원해 행정부를 대체하고 사법 절차를 중단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군이 민간을 대체하여 대신 지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비상계엄은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경험했던 오랜 군부독재의 추억을, 우리 같은 87년 민주화 이후 세대들에게도 경험해 볼 것을 권하는 잘 짜인 타임슬립 드라마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뭐 추억을 가진 이도 경험을 원하는 이도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말이다.


우리 헌법 제77조는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여 계엄으로 인한 조치의 범위를 행정부와 사법부에 한정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입법부인 국회가 계엄 해제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적법한 비상계엄을 위해서는 따로 국회에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밤 대통령은 국회를 군대와 경찰로 봉쇄하려 했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는 증언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 더해 대통령은 선거관리위원회도 장악하려고 했다. 선관위는 행정기관도 사법기관도 아닌 독립적 헌법기관이다. 선관위는 공직선거를 관리하는 기능 외에 헌법상 특별한 역할이 없는 기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선관위를 장악하려 한 이유는 놀랍게도 "부정선거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도랑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도 뽕도 따고, 꿩 먹고 알 먹고, 마당 쓰고 엽전 줍는다지만, 비상계엄 차에 부정선거 의혹을 조사한다니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요즘 젊은 사람들 용어로, 켠 김에 왕까지, 뭐 그런 건가. 비상계엄이 절대반지도 아니고 뭐든 다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비상계엄과 같은 엄청난 권한을 헌법이 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까지 준 것일까?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국민의 수가 너무 많으므로 직접 민주주의는 쉽지 않다. 그것은 아테네와 같은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현대 국가는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가 국민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할 권한을 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대표자는 법에 따라 권한행사에 제한을 받는다. 대통령이 권한을 마구잡이로 행사하여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비상계엄과 마찬가지로 국회에 견제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왜 국회에 그러한 권한을 줬을까? 국회 역시 선거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통령과 국회를 비교해 보자. 각자가 다른 선거이기는 하지만, 국민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표자인 것은 둘 다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은 국가의 행정을 통할하는 권한을 가진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해소하기 위한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은 남용될 수도 부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것을 견제하여야 하는데 우리 헌법은 이 견제기능을 또 다른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에 주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대통령제를 채택한 미국을 보자.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정치권력 자체를 불신했다. 사람과 달리 권력은 선의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권력은 분립해야 하고 분립된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어야 개인의 생명, 재산, 자유가 보호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미국의 대통령제는 기본적으로 권력에 대한 불신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액튼 경의 말이다. 액튼은 Lectures on Modern History(1906)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


"변화는 빨랐으나 진보는 늦었던 400년간, 자유가 유지되고 확보되고 확대되어 마침내 이해된 것은 폭력의 지배와 항상 존재하는 악의 지배에 부득이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약자들의 결집된 노력 덕분이었다."


결과적으로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로 인한 혼란상황은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에 따라 잠시 안정화되었다. 비상계엄 선포 과정의 위헌, 위법성은 별론으로 하면, 비상계엄 해제 과정은 헌법에 따라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회가 대통령을 견제하여 안정적 균형상태로 되돌린 것이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제가 전제한 권력에 대한 불신, 그로 인한 견제와 균형일 것이다.


여전히 비상계엄의 여파로 사회는 혼란스럽다.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4년 중임제로 바꿔야 한다거나 내각제를 실시해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하지만 현재의 1987년 헌법이 지난 38년의 세월을 견뎌온 건 그만큼 한국 현실에 맞게 견제와 균형을 잘 이뤄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도 사실상 지금의 헌법이 막아낸 것이다. 여소야대로 국정운영이 어렵다고는 하나 만약 여대야소였으면 지금도 사이렌 소리 들으면서 계엄치하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밝혀진 계획대로라면 몇몇 정치인과 선관위 직원들은 케이블 타이에 묶여 수방사 지하벙커에 갇힌 상태로 새해를 맞이했을 수도 있다.


결국 핵심은 대통령과 국회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에 있는 듯 보인다. 4년 중임 대통령제 같은 대안은 뭔가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로 파보면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라는 점 외에는 큰 장점도 단점도 보이지 않는다. 내각제도 바찬가지다. 우리 정치 맥락에서 얼마나 잘 작동할 것인지, 권력 간 견제는 충분히 이뤄질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없다면 역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1987년 현행 헌법 체계를 중심으로 기존에 발생한 문제점을 미세하게 핀포인트 조정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계엄조건을 명확히 하거나 해제조건을 완화하거나, 탄핵조건을 명확히 하거나 직무정지규정을 완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현실과 맞지 않는 내용들을 조금씩 수정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현재의 헌법으로 근 40년을 적응하여 왔으니 사회도 정치도 국민도 어느 정도 경로의존성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방에 뭔가 가시적으로 큰 변화를 꾀하는 것보다 맥락을 고려하여 예쁘게 다듬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여야 정치인 모두가 맞다고 하면 그건 틀린 거다'라는 여의도 격언이 있다. 현재 여야 정치인 모두가 현재의 헌법에 불만이 많은 걸 보면 아마도 이 아이가 여전히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어퍼컷 같이 시원한 한 방보다는 꾸준한 쨉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비상계엄에 따른 혼란과 정신적 스트레스의 빠른 종식을 기원합니다.